2020. 5. 10. 부활 제5주일 -가해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요한 14,1-12

부활대축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접하게 된 제자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환희와 기쁨 그리고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여 있지요. 아직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들도 잘 묘사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당신 부활 사건의 주변인으로 머물지 않고 그 부활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사명과도 연관되는 것입니다.

3년 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몸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무슨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일까요? 공자님처럼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빵 두개와 물고기 다섯마리로 5천명을 먹인 대단한 ‘기적’ 같은 일을 많이 행하셨기 때문일까요?

사실 제자들은 그토록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이 대권을 잡으면 높은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손익계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하루는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와 청하지요. “선생님, 혹시 선생님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시면, 우리 두 아들 좀 잘 봐주십시오. 하나는 오른 쪽 영의정을 시켜주시고, 작은 애는 당신 왼쪽 좌의정을 시켜 주십시오.” 소위 인사 청탁입니다. 치맛바람이지요. 이 이야기를 엿듣던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화를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런 자리 하나쯤은 기대했기 때문에,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쫒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맑은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선생님이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던 위대하신 분이, 덜컥 체포되어 대사제 앞으로, 총독앞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습니다. 판결은 24년형도 아니고, 종신형도 아닙니다. 사형입니다. 그런 판국에 출세는 무슨 출세란 말입니까 . ? ‘나도 잡히면 저 꼴로 죽지 않을까’ 두려워서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 속에 나타납니다. 어부출신 이었던 제자들은 모두 고향 갈릴래아로 돌아가 다시 고기를 잡습니다. 십자가 사건이후의 이 이야기들은, 부활절 이후 미사 복음들을 통해서 잘 접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한 번 배와 그물을 버리고(이번에야 말로 완전히 버리고) 고향을 떠나 그 끔찍했던 장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모이기 시작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장났던 주님의 사업이 어떻게 제자들에 의해서 다시 시작될수 있었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겠습니까? 이 해답이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를 알려줍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아’,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되돌아가니, 엠마오로 갔던 두 동료들도 돌아왔고, 의심장이 토마스도 돌아왔고, 데모꾼 시몬도 모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세상 곳곳에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이 진리를 전하는일로 제자들은 미친 자로 오해받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당신의 말씀에 거짓이 없었던 분, 그분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진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죽음 앞에 도망치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광장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깊은 물속으로 나아가 그물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 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첫날 베드로는 3,000명의 사람들을 낚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체포되었고, 바오로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야고보는 이미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제자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들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말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기억을 더듬어 조금씩 조금씩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제자는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때, 사람들이4,000 명이 되었다고 우깁니다. 어떤 제자는  5,000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제자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빼고 장정들만 5,000명이라고 주장합니다. 4,000명이건 5,000명이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극장표 수를 헤아리듯 그 숫자를 헤아린 것은 아니겠지요. 조금밖에 없는 식량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그 기적을 일으킨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또 어떤 제자는 예수님과 타볼 산이라는 곳으로 피정(避靜)을 갔을 적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시는 비전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자 한 수 더 뜨는 제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적에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나타나면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지요. 아니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는 순간 천사께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것을 알려 주었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한 수 더 뜹니다. 그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을 때에, 또는 잉태되셨을 때에, 아니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 세상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여진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제자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신앙을 고백한 글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고, 교회가 시작된 출발점이요, 바로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우리는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4.17)

이처럼 부활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 인생의 여정 길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인 거친 골고타 언덕과 같을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에 더욱 깊이 동참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우용국 실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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