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6. 부활 제3주일 -가해

길동무

루카 24,13-35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하숙생”이라는 옛날 유행가는 시간이 지나도 불리는 명곡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내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런데 그 인생길은 잘 닦인 길도, 쭉 뻗은 고속도로도 아닙니다. 굴곡이 많고, 울퉁불퉁하고, 내리막보다는 오르막길이 많은 산길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길을 혼자 걸어간다 생각하면, 참 걷기 힘든 길이지요.

오늘 복음의 두 제자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실망과 슬픔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시고 큰 힘을 지니신 분이셨고, 그들이 사랑했고 우러러 보았던 분이 난데없이 난폭한 죽음을 당하는 사건을 접하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슬픔 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거나 믿을만 한 사람한테야 이야기할 수 있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여행 목적이 있어서 바쁘게 가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기대하고 존경했 던 분의 비참한 최후와,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 굴복하는 정의와 진리… . 못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요 며칠 동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대책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허탈한 발 걸음을 옮길 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시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셨습니다. “걸으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요?”

그들은 함께 걸으면서도 이 낯선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정작 그 옆 사람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두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주님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조금 머뭇거린 후에야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께서는 더 이상 자연적인 존재일 수가 없 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 분이시기 때문에 자연적인 우 리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오 직 그분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드러내시고 가르쳐주실 때에야(계시啓示) 비로소 인간은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초월적인 존재), 인간의 감성만으로도(막달레나) 이성만으로도(토마를 비롯한 제자들) 그분의 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분을 과연 어떻게 알아차리고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인식능력이 바로 믿음(信仰)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주 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자렛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볼 눈(믿음)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으 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참 모습’을 알아보기까지는 믿음이 굳어지는 기간이 필요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길 가는 나그네’로 나타나셨습니다. 교회(신앙인)는 이 세 상에서 여행 중에 있는 길손이고 예수님께서는 늘 교회와 함께 길동무가 되어오셨습니 다. 그리고 이 여행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엠 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이 낮선 나그네를 그들의 길동무로 초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 고 길동무이신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응한 손님이었지만 어느 순간 주인이 되셔서 빵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손님으로 초대받았던 사람이 이제 그들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다가오셔서 ‘무슨 일이오?’하고 말씀하시지만, 우리 는 어쩌면 이렇게 대답하면서 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매우 심란하니 나중에 이야기해요”

사는 게 힘들고 여유가 없고 역경 속에서 실망할 때, 우리는 때로는 하느님을 멀리하 곤 합니다. 실상 주님의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때임에도 말입니다. 죄책감에 빠져서 냉담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매달려야 함에도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걸었던 그 오르막길은 바로 우리 자신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루지 못한 꿈, 성취하지 못한 계획이 우리를 실망케하고 좌절케합니다. 그래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만 외롭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분명 우리와 함께 가십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치 않은 모습 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동료라든가, 선배, 가족, 혹은 주위의 신 자들, 혹은 전혀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말을 건네시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성체조배 중에 때로는 미사성제 중에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들기시면서 말을 건네십 니다.

우리도 인생(삶)이라는 각자의 여행 중에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겠습 니다. 우리가 나의 여행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어야지, 실망과 슬픔을 주님과 함께 나누 며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깨어진 꿈, 무산된 계획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 십니다.

오늘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서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구번역: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닫혀있는 마음은 감동을 느낄 수 없음을 기억하며, 주님으로부터 ‘뜨거운 감동’을 느 낄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우용국 실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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