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4.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마태오 28,16-20/ 사도행전 1,1-11

저는 개인적으로 미술관과 박물관 구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국에 와서 그동안은 여유가 없어서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지난 3월 6일과 7일에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볼 것도 많은데 게다가 공짜이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일을 맞이했는데, 뉴스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워싱턴 내 모든 박물관을 닫겠다 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막차를 잘 타고 온 셈이지요.

박물관 중에 항공 우주 박물관이 있지요. 아폴로 달 착륙선도 있고, 우리 인류 가운데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우주복도 전시되어 있었 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60년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 린’은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지구 궤 도 저 편 우주상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늘에 올라 와 봐도 하느님은 안 보인 다.”라고 지상 우주 센터에 메시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무신론적인 주장을 펼친 것이라기 보다는, 전후 맥락을 함께 보면 ‘우리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만큼의 성과를 내었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 ‘우주와 지상센터간의 최초의 통신’은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주 통쾌한 말이었습니다.

“하늘에 올라 와 봐도 하느님은 안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그분은 과연 하늘 어디에 계시다는 것일까요? 최소한 은하철도999를 타고 안드로메다까지는 가야지 찾아볼 수 있을까요? 혹시 성서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구름 저편으로 오르셨다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는 무려 2000년 전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 기서 하늘에 올랐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이,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뚫 고서 우주 저쪽으로 떠났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공간’으로서의 Sky와 ‘상태’의 개 념인 Heaven의 차이가 아직 모호하던 때이지요.

하늘로부터 환웅 이 내려왔다는 우리나라 단군신화가 ‘ ’ 기록된 『삼국유사』가 쓰여진 때 가 13세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입니다. 성서는 삼국유사 보다. 최소 2배나 더 오래된 기록이니만큼, 오늘날의 언어표현과는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에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방법처럼, 자구적인 해석 즉, 글 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묵상을 통해 언제나 현재화하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든 하늘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우리가 눈으로 처다볼 수 있 는 하늘인 ‘Sky’ 가 아니라, ‘Heaven’에 해당되겠지요. 2000년 전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늘’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고, ‘구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도행전의 표현은, 그분이 이제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시 다는 뜻입니다. 성부로부터 인간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고 다시 성부께로 되돌아가셨다는 것이 주님 승천 이야기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이 과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언젠가 신학교의 어느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의 승천을 묵상거리로 들려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 승천을 이해한 데에는 저 나름대로 작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인 1980년 제가 아직 신학생이었을 때, 선배 신부님 한 분이 불치의 병에 걸려 서 힘든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였고, 서품 받은 지 1 년 조금 지난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지냈는데, 미사에 참석했 던 많은 신자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그 젊은 사제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미사가 끝나 고 신부님의 관이 밖으로 운구 되면서 퇴장 성가가 나왔는데, 그 성가가 바로 예수 승천 성가였습니다.
‘죽음을 이긴 오 주 예수 하늘나라로 떠나신다…’

이렇게 시작되는 성가를 듣는 순간, 가슴이 찡하면서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 습니다. ‘아, 이 신부님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로 승천하는구나. 무겁게 짊어졌던 병고를 훌훌 다 털어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가는구나.’ 이런 생 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단지 그분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신기한 일이 아닙니 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에게도 위로와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 기 위해서 온갖 수고와 어려움 속에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은 그냥 허무하게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게 되면, 그분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 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지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가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가 살다가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 고, 열심히 살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 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 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이제는 나와 함께 너희도 세상에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 씀입니다. 이렇게 예수 승천은 우리도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신자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삼았습니다. 우리만이 구원받자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기쁨과 광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 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서 전교 하는 데에 상당히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전철이나 거리에서 .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겁주면서 전교 하는 방식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개신교 신자들의 열성은 좀 배워야 할 것 같습니 다. 어쩌면 우리가 전교에 소극적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정말 좋고 귀중한 것이며 기 쁨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 자신이 복음이 정말 좋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주고, 온갖 불화와 다툼 속에서도 평화를 주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식품을 선전하는 사람 이 노란 얼굴을 하고 빌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무도 그 사람이 권하는 건강식품을 사 먹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다시 말하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도 그를 믿지 않겠지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비판했던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분들, 당신들의 성서가 전해준다 는 그 기쁜 소식이 당신네 얼굴에고 쓰여져 있었더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책의 권위 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들이 그토록 애쓸 필요가 없었을거요”.

이는 복음 선포를 하기 전에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정국에서, 어쩌면 유리 가가린이 했던 말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로 서 도전의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의 현실을 현명하고 잘 지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바로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어 마음속에 복음, 곧 ‘기쁨’을 간직하는 것이 나의 힘의 원천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마 음과 영혼의 상태를 유지한 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유쾌함과 기쁨을 잘 지니 면서 지금의 시기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이 곧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미사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선포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복음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우용국 실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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